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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취미와 풍란 기르기
name 동초(垌草) (ip:)
  • date 2006-06-26 20: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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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趣味)와 풍란 기르기

 

   오늘은 ‘취미와 풍란 기르기’를 명제(命題)로 하고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취미로 풍란을  기르는 행위에 주안(主眼)을 두고 풍란을 기르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찾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한다.

  취미를 갖는 것은 긴장 속에서 살아야하는 현대인에게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취미도 다양하여 제각기 다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취미의 종류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며 그 유형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만큼 수가 많다. 따라서 그 종류나 유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겠다. 활동하는 유형에 따라 움직임이 많거나 적은 것으로 나눌 수 있고, 주로 육체적인 힘이 필요한 취미인지 아니면 지혜나 정신의 힘을 이용하는 취미인지로도 나눌 수 있다. 그 외에 경쟁을 위주로 하는 취미도 있을 것이고, 단지 자신의 몸을 단련하거나 정신수양을 위한 방편으로 취미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종류로 많은 유형의 취미 가운데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취미로 식물 기르기가 있다.

  식물을 직접 기르는 것은 정서함양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실내에서 식물을 기르면 식물이 생육활동을 통하여 건조한 실내 습도도 개선시켜줄 수 있다. 또한 식물은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식물의 상징인 녹색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주니 실내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은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풍란은 난과에 해당하는 식물로 풍란을 기르는 것도 식물 기르기의 일종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규모도 작은 범위로 충분히 할 수가 있으므로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특히 난(蘭)은 금란지교(金蘭之交)에서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其臭如蘭)고 한 의미가 말하듯 예(禮)와 기품(氣品)이 들어있어 세상의 평판도 좋다. 풍란을 기른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고 보람도 있는 훌륭한 취미라 할 수 있다.

  풍란이 조금은 생소한 이름인지 가끔은 풍란이 무엇이냐고 필자에게 풍란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 필자도 아직은 수준이 미달이기 때문에 깊은 내용은 삼가고 ‘서당 개 삼년에 풍월한다.’고 그 동안의 경험과 주어들은 얘기를 모아서 궁색한 대답을 하곤 한다. 그리고 말미에는 조금은 흥분한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풍란 기르기를 취미로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낙망(落望)과 기망(企望)과 비애(悲哀)와 열락(悅樂)의 신세계(新世界)를 탐험하는 경험’을 가지는 특별한 기회이며 풍란 기르기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곡소비환(哭笑悲歡)으로 점철되는 인생살이와 같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남들이  들으면 조금은 과장됐다는 표현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필자는 풍란을 한다는 것은 인생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취미생활을 하다보면 그 취미의 대상물에 잘 어울리는 특색을 강조하는 ‘이미지’가 있다. 풍난을 말 할 때는 ‘창조적 미의 생산자’라고 하면 잘 어울릴 것이다. 풍란이 가지는 ‘예(藝)’라는 미술적 감성을 자아내게 하는 특이한 완성미와 ‘모양(態)’이라는 자태가 풍기는 특유의 형태미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藝)와 모양(態)’이 가지는 미술적 가치는 풍란의 잎이나 줄기(축) 또는 뿌리와 꽃등에 나타난 무늬나 자란 형태가 고유의 유전적 본질대로 발현되어 감상의 가치가 있느냐는 기준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기른 풍란이 바람대로 예와 모양을 가지런히 하여 지극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면 당사자에게는 ‘창조적 미의 생산자’로서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성의 기쁨’을 맞보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풍란을 기르는 취미생활이 보람으로 나타나는 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기망(企望)대로 되었으니 열락(悅樂)의 신세계(新世界)를 맞본 것이다. 이것은 기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풍란이 아무리 ‘창조적 미의 생산자’라 해도 아름다운 미적 눈요기 감으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를 그토록 풍란에 열광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으로만 따진다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나은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풍란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향도하여주는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람(이병기)선생의 글을 한마디 인용하겠다.

  “나는 어느 집에 가서 그 집 난(蘭)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겠다. 고서(古書)도 없고, 난(蘭)도 없이 서화(書畵)나 몇 점 붙여 놓아야 비록 화려광활(華麗廣闊)하다 하나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中略-
  빵은 육체나 기르지만 난(蘭)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앞에서 풍란 기르기를 말할 때 좋은 점만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쉬운 것 같지만 각 품종마다 가지고 있는 ‘예와 모양’을 일정한 수준의 목표치에 근접하게 기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풍란이 하나의 잎을 완성하기 위한 여정이 험난한 것은 일반적으로 생육기간이 길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바라는 좋은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자도 잘 고르고 배양환경도 알맞게 하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종자만 좋으면 자촉(2세)이 무조건 판박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배양환경이 좋다고 없던 예가 새로 생기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래서 풍란을 기르는 것은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이게끔 되어 있다. 같은 모촉에서 나와도 어느 것은 예를 제대로 잘 타고 나오나 어느 것은 반대가 되어 실망을 준다.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몇 개월 만에 본 신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낙망(落望)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다. 기대 했던 천엽이 실망스런 예를 보이면 그동안 공 드린 지극정성에 비애(悲哀)는 더욱 가슴을 쓰리게 한다. 그러나 속만 끓이지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풍란을 기르는 것이 난망(難望)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속담에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는 얘기가 있다. 이 말은 위의 경우처럼 성취의 어려움이 있음을 함축미(含蓄味)있게 표현한 말로서는 제격이 아닐까 한다. 하기야 심혈(心血)을 기울이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성취할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이 있다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란스러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풍란이 지금처럼 좋아질 지도 의문이다. 인간에게는 도전적인 마음이 내재되어 있어 은연중에 외부로 발산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 매력이 상실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풍란이 가지는 특이한 매력인 물질로서의 희소성은 물론이고 난을 치는 정신수양의 관점에서의 가치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관엽식물 기르듯이 특별히 그것을 기를만한 가치가 반감될 것이니 그 행(行)함에 도전할 동기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수한 애배자(愛培者)가 그 혼돈(混沌)의 심연(深淵)속에 자신을 정열과 성실성을 한데 묶어 내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집 난대의 제일 좋은 자리에는 촉수가 12촉이나 되는 무지 금광금이 자리 잡고 있다. 왜 무지 금광금을 명당에 놓았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 난도 처음부터 무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상예는 아니었지만 제법 무늬가 있었던 1촉짜리 금광금 종자목이었다. 이 난이 자라면서 원 조상으로 돌아가려고 세월을 거꾸로 세는지 천엽이 나오면서 처음에는 조금, 그 다음에는 반 이런 식으로 무늬가 점점 없어지더니 결국은 나오는 천엽마다 무지로 변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나오는 자촉들이 전부 무지인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자촉을 받으려고 무지 촉을 떼어낼까도 했으나 그것도 생명이고 설마 또 나오랴 하고 기다리다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속도 상하고 가망도 없고 해서 구석진 곳에 보냈다. 언젠가 철이 들면 좋은 자촉을 내겠지 하는 일말의 희망도 남겼다. 그런데 철이 들라는 금광금은 철이 안 들고 필자가 먼저 깨달았다. 그래 기다려 보자 어차피 기다리는 것이 풍란 기르기가 아니겠나. 금년 봄부터는 제일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올려놓았다. 그리고 큰 희망을 실고 기다린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꽃대도 서너 개씩 올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자라고 있다. 어차피 인생살이나 풍란 기르기나 매일반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곡소비환(哭笑悲歡)이 순차적으로 돌다보면 웃을 일이 반드시 생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안 되었으니 다음에는 틀림없겠지 하는 확신이 있는 기다림이 실망보다 크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려라 기다림만이 능사다 이렇게 말 하고 싶은 것이 풍란 기르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풍란을 기르는 데는 ‘기다림’과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살이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관심은 비단 사람 사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풍란은 기르는 사람의 정성을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조석으로 들여다보고 추운지 더운지 알뜰살뜰 살펴야 한다. 그런데 관심을 가진다고 욕심을 부려서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관심과 욕심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오늘보고 한 달 후에 보면 분명히 달라져 있지만 내일 보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과욕을 부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놨다 한다. 속에는 물이 가득 찼는데도 계속 물을 주어 물배를 만든다.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빨리빨리 자라라고 비료도 지나치게 준다. 영양과다는 건강을 해칠 뿐이지 이득이 하나도 없다. 빨리 커라! 빨리 커라! 이게 다 빨리 빨리 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감춰진 속에 상대를 생각 않는 교만함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생각하는 이상형이 나올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욕심을 이리저리 내봐야 결과는 애꿎게 풍란만 못 살게 구는 꼴이다. '실 바늘허리 꿸 수 없다.'는 속담은 어느 경우나 들어맞는 이치다. 풍란은 교만을 허락하지도 않고 욕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풍란은 정도(正道)를 벗어나서는 정작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교훈을 준다는 사실만을 깨달도록 할뿐이다.

  이처럼 풍란을 기르는 것은 그 행위로 인하여 나를 관조(觀照)케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화(敎化)의 역할도 한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슬기롭게 인생을 가꾸게 한다. 예부터 선비들이 난을 항상 가까이 두고 그 정신을 닮으려고 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풍란을 기르는 것은 분명 즐거움을 근본으로 하는 취미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욕심 없고, 바르고, 깨끗한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은 마음을 새겨 지니게 하는 수양의 길을 열어준다.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은 ‘내적인 관조와 교화’를 통하여 나의 내면에 위치한 불순한 찌꺼기들을 맑게 씻어내고, 정신적인 건강과 만족을 이루는 데에서만이 보장된다고 하였다. ‘관조와 교화’는 풍란 기르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최고의 ‘예(藝)‘요 최상의 ’모양(態)‘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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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훈 2011-09-17 14:54:37 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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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팸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기존이 훈훈해 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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